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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는 호모 나르시쿠스(Homo Narcissicus)인 우리가 만들어낸 환상의 방어기제입니다."

2026년 현재, 우리는 소위 '나르시시스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유튜브와 SNS는 온통 나르시시스트를 감별하고 회피하는 법으로 가득하죠. 하지만 잠시 멈춰 생각보시죠. 누군가를 ‘나르’라고 규정하고 피하려는 그 행위 자체가, 사실은 내 안의 나르시시즘을 가리기 위한 방어기제는 아닐까? 남들보다 특별해야 하고, 완벽하게 '나다워야'한다는 명령 아래서, 우리 모두는 거울에 갇힌 채 서서히 소진되어가는 '호모 나르시쿠스'가 된 것은 아닐까요?

이번 시즌 직장인문학 팀에서는 이졸데 카림의 『나르시시즘의 고통』을 나침반 삼아, 우리 시대를 장악한 이 매혹적이고도 잔인한 심리적 장치를 파해쳐보려고 합니다. 단순히 이론을 머리로 배우는 시간이기 보단 정신분석 텍스트와 소설, 영화라는 다채로운 자료를 통해 우리 심리의 내면극장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영화 <블랙 스완>과 <마스터>를 가로지르며 완벽이라는 독재적 명령에 균열을 내고, 이미상·위수정의 소설을 읽으며 '자기다움'이라는 세련된 착취의 정체를 목도할 것입니다. 읽을거리에 대한 부담은 내려놓으셔도 좋습니다. 파트너가 핵심 내용을 정교하게 큐레이션하여 매회 배포해 드립니다.

본 세미나는 파트너의 발제를 디딤돌 삼아, 멤버들이 각자의 삶과 욕망을 자유롭게 꺼내놓는 토론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때로는 그룹 상담처럼 서로의 심리적 이슈를 깊이 있게 나누고, 기회가 된다면 연극 <바냐 삼촌>과 같은 고전을 함께 관람하거나 직접 낭독하며 텍스트 속 인물이 되어보는 입체적인 경험을 제안합니다. 특히, 자아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의 입구에 서고 싶은 멤버들을 위해, 원하실 경우 개별적인 정신분석 예비 면담(질의)의 기회도 열어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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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키소스는 물속에 비친 자신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물 속의 비친 아름다운 이는 누구인가?

물 속에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입도 나르키소스를 향해 다가온다. 황홀한 입맞춤의 순간 차가운 호수의 물결이 나르키소스의 입술에 닿는다. 그는 불안한 일렁임 속에서 흔들리다, 놀라 일어선 나르키소스의 눈에서 결국 사라진다.

나르키소스는 한 번도 가져본적 없는 그것을 상실한다. 그것은 자신의 이미지였으니 가진 것도 갖지 못한 것도 아닌 불가능한 대상일 뿐이다. 나르키소스는 그 불가능 한 것을 잊지 못한다. 그것은 없는 것을 상실한 회복될 수 없는 슬픔이 된다.

아무것도 없음을 욕망하는 슬픔은 멜랑꼴리, 즉 텅빈 것을 상실한 슬픔이 나의 일부가 아니 전부가 되어버리는 회복될 수 없는 우울이다.

나르키소스는 그 텅 빈 곳에 자기를 던진다. 검은 호수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그것이 되려한다. 스스로가 잃어버린 그것이 되고자 한다.

나르키소스는 그 불가능한 상실을 채우고자 자기 자신의 상실, 죽음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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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안내


[Module 1] 거울의 탄생: 왜 우리는 '나르'를 발명했는가?

1회차: "나르"는 호모 나르시쿠스가 만든 자기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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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SNS나 직장인 커뮤니티에서 MBTI만큼이나 자주 보이는 단어가 바로 ‘나르(나르시시스트)’입니다. 무례한 상사나 자기만 아는 동료에게 이 라벨을 붙이고 나면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듭니다. “나는 상식이 있고 건강한 사람인데, 저 사람은 병리적으로 문제가 있어”라는 면죄부일까요?

이 달콤한 ‘나르 감별법’은 호모 나르시쿠스인 우리를 보호하는 정교한 심리적 필터, 방어기제에 가깝습니다. 타인을 문제적 인물로 규정하고 손가락질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나는 저들과 달라"라고 속삭이는 내 안에 은밀한 자기애를 가장 강력하게 드러내는 순간이지요. 타인을 '나르'라고 부르는 것이야 말로 나의 나르시시즘의 명백한 증거일지도 모르죠.

우리는 누군가를 나와 구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나를 이해하기 위한 거울로서 나르시시즘을 꺼내 보려 합니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이라는 개념을 발명하면서 아주 흥미로운 통찰을 던집니다.

“인류의 첫사랑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

갓 태어난 아기가 세상 전부가 자기인 줄 알았던 그 황홀한 시절(일차적 나르시시즘)부터,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자아라는 소중한 대상을 위해 열정적으로 에너지를 쏟아붓는 과정(이차적 나르시시즘)까지. 자아라는 존재가 어떻게 나의 가장 소중한 에너지인 ‘리비도’를 독점하게 되었는지, 그 인류 공통의 은밀한 로맨스에 대한 탐구는 남을 향했던 손가락을 거두어 거울 앞의 나를 지그시 응시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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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 내면극장: '나'라는 무대 위엔 주연 배우와 악플러가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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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자아’를 내 마음속에 들어앉은 단단한 주인공 한 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신분석의 커튼을 열어젖히면, 그곳은 사실 수많은 배역이 뒤엉켜 공연을 펼치는 ‘내면극장’에 가깝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 극장의 첫 번째 주연 배우는 내가 직접 뽑은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수면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홀려 물에 빠져버린 나르키소스처럼, 거울 속에 비친 ‘매끈하고 완벽한 이미지’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사실 그 이미지는 내가 아닌 ‘가상의 배역’일 뿐인데도, 우리는 그 배역이 진짜 나라고 굳게 믿으며 ‘동일시’의 계약서에 서명하죠. 이때부터 우리는 진짜 나의 울퉁불퉁하고 못난 모습은 분장실 깊숙이 숨긴 채, 타인의 박수를 갈구하는 ‘이상적 자아’라는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오릅니다.

이 연극의 총감독(자아 이상)은 늘 완벽한 각본을 요구합니다. “성공한 전문직답게 당당하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친절한 주인공이 돼!”라고 외치죠. 하지만 극장 한구석 어두운 객석에는 가장 잔인한 평론가(초자아)가 앉아 있습니다. 그는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겨우 그 정도야? 너는 가짜야!”라며 야유를 보냅니다. 감독의 무리한 연출과 평론가의 날 선 비난 사이에서, 우리 자아는 늘 배역을 이탈하고 싶은 분열을 겪습니다. 내가 세운 극장에서, 정작 나라는 배우는 소진되어가는 이 역설적인 연극. 2회차에서는 우리 내면극장의 화려한 조명 뒤에 숨겨진 비밀 각본을 함께 읽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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